총 게시물 72건, 최근 1 건
   

"예수께서 가라사대"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18-08-12 (일) 10:08 조회 : 155
설교일 : 2018/08/12
설교자 : 안명훈 목사
본문말씀 : 마 5:1-7, 18:21-35


 “예수께서 가라사대”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1-7, 1821-35)

 

예수께서 말씀하신 “8복”중 다섯 번째는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입니다. 새 번역 성경은 “자비”라는 말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이 말들은 모두 Greek 원어 έλεος(éleos)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에 가장 가까운 영어표현은“Mercy”입니다.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그리고 “Mercy”라는 말과 항상 함께 떠올려지는 말이“Grace(은혜)라는 단어입니다.

 

Mercy&Grace” 이 두 단어는 종종 같은 뜻으로 쓰일 때가 많지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본래 그 말들이 의미하는 것들이 다릅니다. 그 말들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것을 보았는데, 참 간결하고 이해하기가 쉬어서 소개합니다.

 

Mercy and Grace are often confused.

While the terms have similar meanings, grace and mercy are not the same.

To summarize the difference:

mercy is God not punishing us as our sins deserve, and

grace is God blessing us despite the fact that we do not deserve it.

(자비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용서하심으로 우리가 받을 벌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고,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자격을 보지 않으시고 베풀어 주시는 것)


noname01.jpg


즉 “Mercy”는 “용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8복에 나온 예수님의 이 가르침이 단순히 남들에게 넓은 마음으로 선을 행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말씀을 풀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Mercy”와“Grace” 의 차이점을 설명한 많은 자료들을 보면서 본문 해석의 방향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즉 예수께서 8복을 통하여 가르치고 계신 “Mercy”는 “선을 베푸는 자가 복되다”는 뜻보다 “용서하는 자가 복되다”는 것이 본래의 뜻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비한 사람(남들을 용서해 주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모든 잘못들을 용서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얼마든지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들을 벌하실 만한 충분한 이유도 다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들이 죄를 범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무조건 용서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미 보여주신 “Mercy”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들도 그러한 마음을 갖고 다른 사람들을 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고, 용서하며 넓은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남들을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있고, 또 남들에게 자기의 권리를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더라도 그들을 넓은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에게 상식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상대방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더라도 그들을 용서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1)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Mercy”를 기억하고 그것에 보답하는 길이요, (2) 또한 앞으로도 하나님으로부터 “Mercy”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8복의 말씀을 통하여 이러한 성경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8복의 이 가르침을 비유로 설명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두 번째로 함께 읽은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이 비유는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 (18:21-22)

 

 

베드로가 제시한 일곱 번이라는 숫자는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읽었던 외경에 의하면 자기에게 잘못한 이웃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줄 것을 권면하고 있고,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를 세 번까지 용서하되 그 이상은 금하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해 볼 때에 일곱 번씩 용서하면 되겠냐는 베드로의 제안은 매우 파격적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제안을 함으로 자신이 얼마나 관대함을 예수님께 과시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의 무한대의 용서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놀랐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왜 그렇게 용서해야 한다는 말인가?”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시고, 예수님은 오늘의 비유를 들어서 그 이유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왕에게 만 달란트 빚을 진 종 하나가 왕에게 끌려왔습니다. “만 달란트”그 금액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달란트는 그 당시 통용되는 화폐 단위 중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한 달란트는 34Kg의 순금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 달란트는 순금 340,000Kg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가치로 보자면 일꾼이 하루 일해서 버는 돈이 한 데나리온인데, 그것에 6000배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오늘날 가치로 따지자면, 일꾼들의 하루 일당을 100불씩이라고 가정해서, $100 x 6,000= $600,000(6십만 불)에 해당되는 돈이 일 달란트입니다. 그러면 만 달란트는 얼마입니까? $600,000 x 10,000 = $6,000,000,000(60억 불)

 

그런데 비유에 나오는 그 왕은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모든 빚을 탕감하여 줍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Mercy”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종이 그 이후에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왕에게 풀려 난 그 종은 집으로 가는 길에 자기에게 빚을 진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이었습니다. 백 데나리온이라 함은 앞에서 계산한 기준대로 그 가치를 따져보자면 $100 x 100 = $10,000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그것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자기가 탕감 받은 60억 달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금액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라고 말합니다.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합니다.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그러나 그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를 보고 딱하게 여겨서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왕은 크게 노하여 그 종을 다시 불러서 다음과 같이 책망합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내가 네게 그 빚을 다 삭쳐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18;32-33)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왜 이웃의 죄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Mercy”를 이미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Mercy”를 항상 기억하며 이웃에게도 그러한 “Mercy”를 베풀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렇게 완벽하고 철저하게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의 잘못을 항상 기억합니다.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분을 품고 삽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 그 마음은 항상 풍랑으로 요동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는 결코 평화가 없습니다. 지옥과 같은 마음입니다. 남을 향한 미움의 쓴 뿌리가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남을 비판합니다. 모든 잘못을 남에게 돌립니다. 세상이 온통 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방어적입니다. 때로는 심하게 공격적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며 자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던 부모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어떤 때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이상한 복수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그때 이렇게 했지? 당신이 그때 내 식구들에게 그렇게 했지? 언젠가는 나도 당신이 나에게 한 것처럼 그렇게 할 거야.”또 자기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준 사람에 대하여 복수심을 불태우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 그 자신이 불행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동료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 종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심과 분노의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것처럼 어두운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하면 먼저 자신이 감옥과 같은 삶에서 해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마음만이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면 마음에 있던 쓴 뿌리가 뽑힙니다. 미움의 뿌리도 뽑힙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사랑의 뿌리가 새로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을 품으니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용서하는 넓은 마음의 인덕이 생기니, 저절로 인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언젠가 매일 이메일로 들어오는 “고도원의 아침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보았습니다.

 

과거의 상처는 마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뜨겁게 들끓고 있는 화산과도 같습니다. 다 잊어버린 듯 아무렇지 않게 살아간다고 해서 그 상처가 아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먼저 말로 주님께 상처를 시인하고 상처의 원인이 된 누군가를 용서하기로 작정하십시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용서의 문제 이전에 나의 상처 치유를 위한 첫 번째 단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해지길 바라고 원하십니다. 용서를 통해 자유함과 행복을 되찾아 승리하는 인생을 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로부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의 빚을 우리들에게 “백 데라리온” 빚진 사람들에게 갚아 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피차 용서하고 피차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심령과 삶에 천국을 경험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확신과 감격으로 인하여 심령과 삶에 천국을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남들을 용서함으로써 마음의 천국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자비한 사람(남들을 용서해 주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모든 잘못들을 용서하실 것이다).

 


☞특수문자
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