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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2018-06-03 (일) 07:22 조회 : 528
설교일 : 2018/06/03
설교자 : 안명훈 목사
본문말씀 : 마 6:25-34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마태복음 625-34)

 

오늘은 우리 교회가 1년에 한 번씩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지으신 대자연에서 야외예배를 드리는 주일입니다. 오늘 1부 예배에 나오신 성도님들 중에 물론 야외예배 참석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야외예배 참석하지 못하시는 분들도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오늘 이 아침에 제가 야외 예배 때 설교하는 같은 내용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자연을 생각하시면서 이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야외예배 설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의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산”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산”이라기보다 “언덕” 정도의 장소입니다.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하신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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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야외 설교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들풀, 들의 백합, 공중에 나는 작은 새들을 포함해서)을 세밀하게 돌보신다.

2.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 중에서 가장 귀한 존재이다.

3. 들풀과 공중에 나는 작은 새들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그것들 보다 더 세밀하고 자상하게 돌보아 주신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사실이다.

4.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내일 일은 내일을 창조하시고, 내일의 주인이 되시며, 무엇보다 우리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설교를 하시면서,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 들풀”들을 예로 드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런 것들을 예로 드셨을까요? 거기에 큰 나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 정도로 아름다운 꽃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보잘 것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골라서 예로 드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보잘 것 없는 존재를 상징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로 드신 “공중에 나는 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크기의 새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참새 정도의 작은 새들이었습니다. 비둘기 정도라면 가끔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모이를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새에게 모이를 주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이렇듯 “공중에 나는 새”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예로 드신 들에 핀 “백합화”는 어떻습니까? “백합화” 정도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큼 아름다운 꽃이 아닙니까? 우리말 성경에는 “백합화”라고 번역하였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그런 “백합화”가 아닙니다. 들에 흔하게 핀 “야생화”입니다. 영어 성경은 그것을 “wild flowers"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성경 주석은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어 ‘크리나’는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야생화를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말로 번역된 “들의 백합화”도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하실 때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꽃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를 드신 “들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야생에서 자라는 흔한 풀(wild grass)들입니다. 예수님도 들풀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그것들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것들”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것들을 예로 드시면서 강조하여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것들까지 관심을 가지시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대강 죽지 않을 정도로 돌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새들은 아무 걱정 없이 공중을 날며 즐겁게 노래하게 해 주십니다. 들에 핀 풀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정원에서 자란 백합 같고, 또한 솔로몬의 모든 영광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꽃을 피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선교 갈 때마다 아름다운 꽃 사진들을 찍었습니다. 그것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꽃들입니다. 무더운 날씨, 비가 잘 오지 않는 기후. 그런 환경에서는 나무도 풀도 다 죽을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그렇게 아름다운 꽃들을 피우십니다. 오히려 기후가 좋은 곳에서 피는 꽃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색깔도 더 진하고, 화사합니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입니다.

 

몇 년 전 주보 칼럼에 제가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날도 오늘처럼 교회에서 야외예배를 드린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깊은 숲속에 있는 작은 풀

아무도 눈길 한번 주지 않습니다.

참 외로워 보입니다.

아무 의미 없이 세상에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풀도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십니다.

그 풀이 있기에 아름다운 숲이 있습니다.

그 풀도 자기 있는 곳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세상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존재하다가 그냥 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때로는 들에 버려진 꽃과 같은 신세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처럼, 우리 인생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시편 395-6절은 우리 인생은 “한 뼘 길이밖에 안 되는” 짧은 것이어서, 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같다고 표현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주께서 나에게 한 뼘 길이밖에 안 되는 날을 주셨으니, 내 일생이 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진실로 모든 것은 헛되고, 살아 있는 사람일지라도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으니, 걸어다닌다고는 하지만, 그 한평생이 실로 한오라기 그림자일 뿐...

 

또한 우리들은 때때로 “들에 핀” 꽃처럼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은 버려진 것과 같다는 생각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들의 처지와 형편을 몰라준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남편도 아내도 나의 속마음을 몰라주고, 자녀들도 나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사업이 잘 안되는데, 아무도 나의 어려운 사정을 모른다고 생각되어 질 때가 있습니다. 몸이 아픈 분들은 고통에 시달리는 긴 밤을 보내면서 세상에 혼자 밖에 없다는 외로움에 몸부림 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미국이라는 큰 들판에 홀로 서있으면서 온갖 풍파를 다 겪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공중의 나는 새들보다도, 들에 핀 야생화나 풀들” 보다도 우리들을 더 사랑하시고 아끼시며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2:10)

 

오늘 본문 말씀도 우리 인간은 백합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걸작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않으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그런데 우리들은 이러한 귀한 사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는 걱정합니다. 좌절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적은 사람들은 자연히 그러한 걱정을 하게 된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본문 30)

 

믿음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말하는데, 그 당시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저들이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있고, 또 저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고 믿고 있으면서도, 때때로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있는 자녀들이 부모가 계신 것은 알지만, 부모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도 함께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믿음 (큰 믿음/강한 믿음/ 성숙한 믿음) =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것 +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도 함께 믿는 것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도 함께 믿는 믿음, 이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요, 큰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걱정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는 걱정하지 않고, 정말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됨을 오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돌보심을 믿는 사람들은 1)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걱정을 접어 두고, 2)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콜라 제단의 모든 성도 여러분,

눈을 들어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위대하신 하나님입니까? 얼마나 멋진 분이십니까? 하나님의 작품들을 바라보시면서 위대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가장 귀한 걸작품임을 깨달으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에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이 모든 창조물보다 가장 귀한 존재이다. 하늘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그보다 훨씬 더 귀한 우리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아 주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창조주이시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대하여 가져야 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특수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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